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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산 전용선 단소산조 자료모음

추산 전용선 약력

by 月華(월화) 2017. 12. 4.



추산 전용선의 단소 예술

1, 생애 . (1887~1967).

단소산조의 창시자인 전용선은 1887 년에 전라북도 정읍 고부 에서 태어났다.

“추산” 은 호 이고,신소(神簫), 소선(簫仙), 이라고 했는데 그의 단소 솜씨가 신에 비유 될만큼 탁월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 추산은 줄풍류 와 산조 모두에 능한 예인이었고, 산조에 대해서는 일부 국악인들 사이에서 “추산이 산조를 창시해서 그로서 끝막음을 했다.” “단소로 산조를 짤만큼 단소에 그 기예가 절륜 하였다.”라고 하였다.

추산의 줄풍류는 구례나 익산 지역에 전승되는 가락에서 추산의 단소 가락을 연주하고 있으나, 일반인 에게는 많이 공개 되지 않았다.

어린시절은 중농가(中農家) 에서 태어났다.사형제의 셋째로 태어나 서당에 나가기 보다는 놀기를 좋아한 추산은 17세에 처음 단소를 접하였다 한다. 단소에 애착이 강해 단소를 품고 잠을 잤다고 한다. 이러한 추산을 집에서 내논 자식 취급을 하고, 동네 어른들 까지 외면 하였다 한다. (예용해의 인간 문화재 중에서)

그의 스승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고, 그의 집안 어른인 ‘전계문’ 에게 사사 하였다고 한다. 전계문은 국악 명인 으로 알려져 있는데, 대금풍류는 정경태의 “국악보”에 실려있다. 추산의 풍류는 전계문의 대금가락 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 전북대학교 박물관 에서 발행한 [‘정읍지역 민속예술’]에서는 ”허창” 이라는 분에게 사사 했다고 전해진다. 추산은 단소이외에 대금,가야금,거문고 등에도 걸출한 기량을 지니고 계셨고, 단소는 신 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한다. 정악을 먼저 배우고,다음에 산조를 하였다 한다.

추산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알수 없는 이유는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방랑벽으로 인해 전주국악원 에서 후진양성에 힘쓴 일과, 1963년 12월20일 국악진흥회 에서 국악상을 시상 한일 외 에는 더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제자인 ‘김무규’는 추산을 1935년부터 10여년간 모시고 있었다고 언급한바 있고, 추산의 장례까지 치루었다고 한다. [정읍 지역 민속예술]에는 1930년대 후반에 정읍의 부호 김기남 의 산정에 머물며 김용금,신달용,이기열,나용주,등과 어울려 풍류를 즐겼다한다. 추산의 성격은 괴팍 하였다고 한다. 제자인 김무규는 그에게서 산조를 배울 때, 그가 한번 연주해주고 바로 그 자리에서 해보라하고, 이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가르치기를 그만 했다고 한다. 또 한 녹음 하기를 꺼려해서 몰래 녹음 한적이 많았다 한다. 그를 친 아버지 처럼 따랐던 “김소희”명인이 어느 비오는 날 녹음한 산조가 가장 깨끗하게 전해져 오고 있고, 방송을 탄적이 있다.

추산은 1963년 국악상 시상후 서울에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세상을 떠났다. 그는 빈궁한 생활속 에서도 단소를 놓지 않았다 한다.

“단소는 끝내는 영(靈)인 것이여,” 추산의 말.


2, 추산 의 음악

우리나라 에서의 “구전심수” 음악 전승체계 속에서 예술가들이 일가(一家) 를 이루는데 있어 스승의 가락을 답습하여 발전시켰던 것과 달리 추산은 단소의 주법을 스스로 개발하고 새로운 가락을 만들어 내는 등 다른 예술가들과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그의 줄풍류는 정악이 가지는 자유로운 변형을 거부하는 독특한 음악적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음정과 가락이 단순하면서도 담담한 선율을 담백하고 깔끔하게 처리하는 것 에서 그의 예술적 재능을 느낄수있다.

산조에 있어서 그의 창조적 재능이 발휘 되는부분이다. 산조 라는 것이 음악본연이 유동적인 가락과 절묘한 연주 기법이 필요하고 많은 악기적 제한을 가진 단소로서 산조를 연주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고 할수있다.

그러나 추산의 산조는 어색하거나 이상하지 않다. 그 선율이 너무 아름답고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오늘날 산조에 무슨 류(流) 라고 하여 악기마다 이를 만든 작곡자의 이름을 대는 것이 보통이다. 추산의 줄풍류는 그의 집안 어른인 전계문에 의해서 전승된 것이 확실하다.

추산은 “평생을 죽관에 붙여 집안일에 무관하였고,외도도 모르고, 예(藝) 를 돈과 바꾼일 없고,푼돈을 몸에 지닌적 없다” 고 했다-인간문화재~예용해-

그는 “단소를 한(恨) 으로 분다” 고 했다. 이 한이 추산을 정음 에서 산조로 이끌지 않았나 생각된다.스스로도 정음(正音)에 더 힘을 쏟았다는 추산이 단소산조의 명인이 된 것은 그 스스로의 음악적 재능을 절제된 생활속에서 산조로 푼 것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줄풍류는 듣노라면

그 웅장함은 거문고의 다스름을 듣는듯 하고, 그 가락의 유연함은 해금의 물 흐르듯이 연결된 선율과 닮아 있다.

제자는 무형문화재 제 83호 기능보유자 김 무규 명인 (고인)

[글쓴이 : 풍류랑, 이리 향제 줄풍류=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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